국민일보 | 최기영 기자
2025-01-14 03:07
실화를 바탕으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전하는 뮤지컬 '루카스'의 공연 현장(위쪽), 뮤지컬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에서 배우들이 열연을 펼치는 모습. 각 기획사 제공
연일 이어지는 한파가 마음까지 얼어붙게 하는 1월,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문화 콘텐츠가 일상의 활력을 되찾는 데 조력자가 돼준다. 자극적이고, 짧고 빠르게 소비되는 콘텐츠에 익숙해진 지금 같은 시대엔 느리게 흐르는 이야기와 공감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더욱 뭉근한 감동을 안긴다. 겨울방학을 맞은 청소년들은 물론 평범한 일상 속 작은 쉼표가 필요한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마음을 정화해줄 작품들을 살펴본다.
무한 경쟁 속 끝없이 이어지는 성적 압박, 언어적 물리적 폭력으로 인해 뒤틀리는 교우 관계. 이 시대의 청소년들이 느끼는 일상의 단면은 차갑기만 하다. 영화 ‘괜찮아 앨리스’(감독 양지혜)엔 대다수가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 용감한 ‘앨리스’들이 등장한다.
학생들은 갇힌 교실에서 벗어나 ‘꿈틀리 인생학교’에서 1년간 온전히 자신을 돌보고 탐색하며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한다. 이를 통해 각기 다른 상처와 고민을 가진 청소년들이 학업과 사회적 압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과 행복을 탐구한다. 영화를 통해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청소년은 공감과 위로를 얻고 청소년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는 자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청소년기에 같은 고민으로 방황했던 관객들은 ‘진정한 치유’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다.
2022년 부커상(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 후보에 오른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이처럼 사소한 것들’(감독 팀 밀란츠)은 우리네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평범한 중년 가장의 용기 있는 결단을 다룬다. 주인공인 빌 펄롱은 아내와 함께 다섯 딸을 키우며 살아가는 석탄 장수다. 어느 새벽, 그는 가장 중요한 거래처인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야외 창고에 감금된 채 학대당한 흔적이 역력한 여성을 발견하곤 고뇌에 빠진다.
지역 사회의 대소사를 관장하며 마을을 장악하고 있는 수녀회. 막강한 권력을 지닌 집단의 어두운 실체를 밝히는 것은 한 개인과 가족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불의 앞에서 현실적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진정한 이웃이자 크리스천이라면 마땅히 택해야 할 정의로움을 몸소 보여준다.
영화는 현실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진실은 묻히고 진영논리에 편승한 편 가르기만 팽배한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동시에, 작지만 위대한 결단이 소중한 연대의 마중물이 되고 세상의 변화를 움트게 한다는 진리를 되새긴다.
일상 속 익숙한 공간 중 하나인 빨래방. ‘이곳을 찾는 이들이 테이블에 놓인 노트에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는다면?’ 뮤지컬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연출 김기석)의 비밀 노트에는 마음을 털어놓는 힘이 있다. 누군가 고민을 적으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고민을 읽고 진심을 담아 위로의 댓글을 남기며 서로의 마음을 보듬는다.
반려견과 살아가는 어르신, ‘기러기 아빠’인 성형외과 의사, 드라마 보조 작가, 가수 지망생 등 빨래방만큼이나 익숙한 우리 이웃들이 써 내려가는 정겨운 안부와 묵직한 고민, 사람 냄새나는 응원들은 사람의 온기가 그리운 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전해준다. 세밀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다양한 일상 묘사와 그 안에서 놓치지 않는 소소한 웃음 포인트가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낸다.
뮤지컬 ‘루카스’(연출 장선아)는 선천성 뇌 기형으로 인해 ‘생후 10여분 밖에 생존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태어난 아기 루카스가 발달장애인 부모의 조건 없는 사랑과 공동체의 관심을 받으며 17일을 숨 쉬다 세상을 떠난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됐다. 죽음이 예정된 태아를 출산하고 사랑을 쏟아붓는 과정을 따뜻하고 유쾌하게 풀어나가며 관객 스스로 ‘인간의 존재 가치’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특히 선천성 뇌 기형이나 발달장애 등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다루는 가운데서도 재치 있는 유머와 가슴 먹먹한 감동을 억지스럽지 않게 씨실과 날실로 엮어낸다.
극단 광야아트미니스트리의 윤성인 부대표는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는 젊은 세대 사이에 ‘매운맛’ ‘마라맛’ 등의 수식어가 붙는 자극적인 콘텐츠에 열광하는 모습이 확산하는 동안, 역설적으로 ‘무공해 영화’ ‘청정 뮤지컬’ 등 마음에 힐링을 주는 작품을 찾는 이들도 많아졌다는 점은 의미 있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어 “공연 후기를 보면 ‘심심하고 재미없을 것 같았던 편견이 깨졌다’ ‘다시 자극적인 콘텐츠를 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관객 반응이 적잖게 눈에 띈다”며 “사회가 혼란을 겪고, 한파로 몸이 위축될수록 생명과 존재의 소중함 등 본질적인 가치를 재미있고 진정성 있게 표현해 낸 작품들을 경험하며 스스로 온기와 위로를 얻는 관객들이 많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